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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국가직 9급-한국사 (S)책형 기출 문제 및 정답 본문

공부/한국사

2014 국가직 9급-한국사 (S)책형 기출 문제 및 정답

수박참외멜론 2025. 6. 3. 01:15

 

 

 

 


문  1.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는 삼국시대의 금석문은?

○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호칭할 때 ‘동이 매금(東夷 寐錦)’이라고 부르고 있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① 광개토왕비
② 집안고구려비
③ 중원고구려비
④ 영일냉수리비

 


정답: ③


해설: 중원고구려비 -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

                              - '신라 토내 당주': 고구려 군의 신라 주둔

                              -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로 지칭, 신라 왕을 '매금'이라고 낮춰부르는 말로 지칭

                              - 고구려가 신라 매금에게 의복과 음식을 '하사'

 

        ① 광개토왕릉비 - 전반적인 내용: 고구려 건국 신화, 추모왕(동명왕), 유류왕(유리왕), 대주류왕(대무신왕)의 계보 정리

                                 - 정복 활동: 만주 정복, 신라 구원, 백제(아신왕 항복)·동부여·숙신·후연·비려(거란) 정벌

                                 - 수묘인에 대한 기록: 수묘인(능 지기)의 숫자와 차출 방식(요역 징발 실태)·관리 규정 기록

                                 - 천하 인식: 천손 의식 표출

                                 - 신묘년 기사(신라에 들어온 일본 격퇴)의 해석: 일본-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자료로 활용 / 정인보-주어를 고구려로 해석 ⇒ 한일 역사 논쟁

        ④ 영일냉수리비(지증왕) - 왕과 귀족 사이의 재산 분쟁

                                              - 지도로(지증왕 이름) 갈문왕(왕 다음의 서열, 왕과 협업하는 자)

 

 

 

문  2. 신라 하대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을 알려주는 다음의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心性)을 도야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불성(佛性)임을 알면 그것이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견성오도(見性悟道)에 있었다. 


① 전제왕권을 강화해주는 이념적 도구로 크게 작용하였다.
② 지방에서 새로이 대두한 호족들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③ 왕실은 이 사상을 포섭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④ 인도에까지 가서 공부해 온 승려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정답: ②

 

해설:

교종 선종
경전 연구 (교리 연구) 참선, 좌선
"그대로" → 보수(세력) ⇒ 5교 "스스로" → 진보(세력) 
계율종: 자장 개창 - 선덕여왕 - 양산 통도사 불립문자, 견성오도(돈오), 이심전심
열반종: 보덕(고구려인) - 무열왕 -전주 경복사 9산 (선문)
법성종: 원효 개창 - 문무왕 - 경주 분황사 가지산파(도의): 장흥 보림사
화엄종: 의천 개창 - 문무왕 - 영주 부석사 수미산파(이엄): 해주 광조사
법상종: 진표 개창 - 경덕왕 - 김제 금산사  

 

        ① 교종

 

 

 

문  3.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국은 서양과 180도 정도 차이가 난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변두리로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변두리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은 땅에 따라서 모두 그러한 것이니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다.


①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②  「임하경륜」을 통해서 성인 남자들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을 주장하였다.
③ 『동사』에서 조선의 자연환경과 풍속, 인성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④  「동국지도」를 만들어 지도 제작의 과학화에 기여하였다.

 

 

정답: ②

 

해설: 실학자 홍대용 (중상학파)

        - 「임하경륜」: 선비들의 생산 활동 종사를 주장, 성인 남성에게 2결씩 토지 분배, 병농일치제 주장, 부국강병을 위한 기술 혁신과 문벌제도 철폐 주장

        -『의산문답』: 실옹과 허자의 문답식 대화집, 지전설-세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다→중국 중심의 세계관 극복

        - "무한우주론": 김석문이 처음 주장(『역학도해』) →홍대용 →최한기(『명남루총서』,『지구전요』) →개화 사상의 시작

 

         ① 『동국지리지』-한백겸: 역사지리서, 고대 지명을 새록게 고증→고구려 발생지가 만주임을 최초로 고증, 고증학의 태동
         ③ 『동사』-허목: 기전체 서술, 중화주의 역사 의식 탈피
         ④ 「동국지도」 -정상기(영조): 최초로 100리 척 사용 →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

 

 

 

문  4.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총사령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선임하였다.
② 영국군의 요청으로 일부 병력을 인도와 버마(미얀마) 전선에 참전시켰다. 

③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협력하면서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다.
④ 조선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정답:  


해설: 1940년 충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창설, 총사령관 지청천
         1941년 대일·대독 선전 포고문 발표,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참전→非전투활동(포로 심문, 선전 전단 작성 등)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합류 → 한국광복군의 군사력 증강
         1943년 영국군과 연합작전: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전
         1944년~1945년 미국 OSS와 합동 훈련
         1945년 국내 진공 작전 계획 → 일본의 패망으로 실패


        ④ 조선의용군 - 1941년 조선의용대 분화→윤세주의 조선의용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화북 지역 공산주의 세력(김두봉, 무정) ⇒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 ⇒ 조선 독립 동맹(1942), 조선 의용군 창설(직할 부대)

                              - 중국 팔로군과 연합(태항산 전투, 1942) → 항일 전투 수행(反소탕작전)

                              - 중국 국공 내전 참전

                              - 해방 후 북한 인민군에 흡수

 

 

 

문  5. 8․15 광복 직후에 결성된 정당의 중심 인물과 주요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와 관련된 정 당을 바르게 연결한 것은?

ㄱ.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ㄴ. 송진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하였다. 
ㄷ.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신민족주의를 내세워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①  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②  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③  조선신민당     한국민주당     국민당
④  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     국민당

 


정답: ④


해설: 해방 전후 좌·우익 정당 및 단체

        [좌익] 조선 공산당 개편 → 남조선 노동당: 박헌영 / 북조선 신민당: 김두봉

        남조선 신민당: 백남운

        조선 인민당: 여운형

        [중도]

        국민당: 안재홍

        [우익] 한국 민주당: 송진우, 김성수 (친일 자본가 중심) /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이승만 / 한국 독립당: 김구

 

 

 

문  6. 1960년대 전반 남북한에서 각기 조사 발굴되어 한국사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유적들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남한                        북한
①  제주 빌레못 유적     상원 검은모루 유적
②  공주 석장리 유적     웅기 굴포리 유적
③  단양 상시리 유적     덕천 승리산 유적
④  연천 전곡리 유적     평양 만달리 유적

 


정답: ②


해설: 공부할 필요 없음

         ① 제주 빌레못 유적 77~81, 상원 검은모루 동굴 66년
         ② 공주 석장리 유적 64년, 웅기 굴포리 유적 60~64년
         ③ 단양 상시리 유적 81년. 덕천 승리산 유적 72~73년
         ④ 연천 전곡리유적 78~80년, 평양 만달리 유적 79~80년

 

 


문  7. 통일신라시대 귀족경제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는 밑줄 친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신문왕 9년(689)에 이것을 폐지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이 주어졌고, 한편 일정한 양의 곡식이 세조(歲租)로서 또한 주어졌 다. 그러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다시 이것이 부활되는 변화과정을 겪었다.


①  이것이 폐지되자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라는 사상이 새롭게 나오게 되었다.
②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주민을 노역(勞役)에 동원할 수 있었다.
③  삼국통일 이후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육두품 신분의 사람들에게 특별히 지급하였다.
④  촌락에 거주하는 양인농민인 백정이 공동으로 경작하였다.

 

 

정답: ②


해설: 녹읍 - 전세(조)+공납+역을 수취할 수 있는 권한

         신문왕 - 관료전(687) 시행, 녹읍 폐지(689)

         성덕왕 - 정전 지급(농민에게 지급한 토지, 왕토사상의 실현)

         경덕왕 - 녹읍 부활

 

 

 

문  8. 다음과 같은 풍속이 행해진 국가의 사회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집에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만드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고 한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의 집에 이르러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 앉아 절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게 해줄 것을 애걸한다. 이렇게 두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그리고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둔다.
-『삼국지』 「동이전」-


① 고국천왕 사후, 왕비인 우씨와 왕의 동생인 산상왕과의 결합은 취수혼의 실례를 보여준다.
② 계루부 고씨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된 이후 연나부 명림씨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는 관례가 있었다.
③ 관나부인(貫那夫人)이 왕비를 모함하여 죽이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질투죄로 사형을 받았다.
④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은 국왕이 중국식 혼인 제도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정답: ④

 

해설: 고구려 - 서옥제

        ④ 김흠운의 딸은 신라 신문왕의 왕비

 

 


문  9. 고려의 형률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주로 당나라의 것을 끌어다 썼으며, 때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는 율문도 만들었다.
② 행정과 사법이 명확하게 분리·독립되어 있었다.
③ 실형주의(實刑主義)보다는 배상제(賠償制)를 우위에 두고 있었다.
④ 기본적으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의 4형 체계를 가지고 있 었다.

 


정답: ①


해설: 고려의 법률 -1) 관습법 중시: 중국 당률을 참작한 71개 조의 기본법+대부분은 관습법

                            2) 지방관의 사법권 행사: 중요 사건 외에는 대부분이 지방관이 재량권을 행사

                            3) 형벌 - 종류: 태·장·도·유·사 (5형 체제) → 조선시대까지 유지

                                        - 중죄: 반역죄, 불효죄 등

                                        - 효행 중시: 귀양형 중 부모상 → 7일간의 휴가 / 노부모 봉양 시 → 형 집행 보류

                                        - 삼원신수법: 중죄인 재판 시 형관(재판관) 3인 이상 참여

                                        - 삼심제: 사형수는 3번의 재판 기회

                                        - 관료들의 형벌: 귀향형(고향으로 돌려보냄), 수속법(속동, 벌금형으로 대체 가능)

 

 


문 10. 고려시대에는 귀족·양반과 일반 양민 사이에 ‘중간계층’ 또는 ‘중류층’이라 불리는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이 신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남반은 궁중의 잡일을 맡는 내료직(內僚職)이다.
② 하급 장교들도 이 신분층에 포함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③ 서리는 중앙의 각 사(司)에서 기록이나 문부(文簿)의 관장 등 실무에 종사하였다.

④ 향리에게는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지 않았다.

 


정답: ④

 

해설: 고려의 중류층 - 성립: 통치 체제의 하부 구조 담당(행정 실무 담당)

                              - 특징: 직역 세습 + 토지(수조권) 지급 = 전정연립

                              - 유형: 하급관리-서리(중앙관청), 역리(역 관리), 잡류(말단 서리)

                                         실무관리-남반(궁중 실무, 내료직 관료), 향리(지방 실무)

                                         기술관리-역관, 의관 등의 잡과 출신

                                         직업군인(군반)-군반 씨족

 

         ④ 고려의 향리는 문과 응시가 가능하지만 조선의 향리는 문과 응시가 불가했다. 고려의 향리 중 호장과 부호장의 자제들이 제술과에 응시할 수 있다. 

 

 


문 11. 밑줄 친 ‘국왕’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국왕은 행차 때면 길에 나온 백성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들었다. 또한 척신 세력을 제거하여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어진 이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하였다. 침전에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하나의 달빛이 땅 위의 모든 강물에 비치니 강물은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① 병권 장악을 위해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②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을 추진하였다.
③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
④ 백성의 여론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였다.

 

 

정답: ③

 

해설: 정조

        [준론탕평, 왕권 강화] - 군주도통론: 도학(성리학)의 정통성은 군주에게 있다.(←이념적 기반)

                                         - 만천명월주인옹: 군주(명월)가 백성(만천)을 직접 통치 ⇒ 격쟁- 직접 만나 민의를 수렴

                                         - 규장각 설치(1776, 정조 즉위년) -왕실의 도서관

                                         - 규장각 기능 강화: 비서 기능(승정원의 승지들이 규장각에서 근무), 과거시험 주관, 문신 교육

                                                                      문한 기능: 서적 간행, 외교 문서 등

                                                                      정책 자문 기능: 경연 진행⇒왕이 주도권 획득

                                         - 규장각의 검서관: 규장각 전체 관리자, 서얼 출신(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 능력 중심의 관리 선발

                                         - 장용영(강력한 국왕 친위 부대) 설치: 모든 군영(5군영+속오군)을 영장이 지휘·통제⇒국왕이 군권 장악

                                         - 초계문신제: 신진 관리 중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정조가 직접 재교육 ⇒ 당파 X, 군신관계+사제관계=정조파

                                         - 이조 전랑의 권한 완전 제거

                                         - 수령의 권한 강화 - 향약을 수령이 직접 주관

                                         - 문체반정(1794) ← 신문제 "폐사소품체" 유행(박지원, 홍대용), 체제 유지 목적으로 금지

        [문물 정비] - 수원화성 건립: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

                         -「고금도서집성」수입: 중국의 동양 최대 백과사전

        [난전의 성장과 신해통공(1791)] - 난전의 등장→시전 상인 타격, 시전의 금난전권 획득(숙종) ⇒ 물가 폭등

                                                        - 신해통공, 육의전(무명, 명주, 모시, 삼베, 종이, 먹물)을 제외한 금난전권 폐지 ⇒ 물가 안정, 자유 상공업 활성화

        [편찬 사업] -『일성록』: 정조의 일기(정도~1910. 한일합방 전), 유네스코 기록 유산

                         - 『대전통편』: 『경국대전』+ 『속대전』 법전 통합

                         - 『증보동국문헌비고』

                         - 『홍재전서』: 정조의 개인 문집

                         - 『무예도보통지』: 박제가, 이덕무, 백동수, 종합무예서 (←척계광의 『기효전서』모델)

                         - 『동문휘고』: 외교 문서 집대성

                         - 『규장전운』: 한자 음운서(한자 음운→한글로 기록)

                         - 『국조보감』: 국왕 열람용 『국조보감』집대성(세조 때 『태종국조보감』처음 간행)

                         - 『탁지지』: 호조 사례집 / 『추관지』: 형조 사례집 /『춘관지』: 예조 사례집 /『규장각지』: 규장전(각) 사례집 / 『홍문관지』: 홍문관 사례집

 

        ① 숙종: 금위영을 설치하여 5군영 완비(1682)
        ② 효종: 병자호란 이후 반청의식 고조 →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 대두

                     →척화주전론=친명배금=대의명분
        ③ 정조: 신해통공
        ④ 영조: 신문고 부활

 

 

 

문 12.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국왕과 관련되는 내용은?

(    )이 원나라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 (중략) … 답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① 노비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을 설치하였다.
②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③ 『동국병감』과 같은 병서를 간행하여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④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정답: ②

 

해설: 공민왕의 개혁 정치(1351~1374)

        1. 배경: 원·명 교체기 + 신진사대부의 성장

        2. 반원 자주 정책 - 친원파 숙청: 기철 제거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 관제 복구

                                   - 영토 회복: 쌍성총관부 탈환 (유인우), 이성계와 지용수가 요동성 함락(이후 반환), 북진 정책(초산~길주)

        3. 왕권 강화 (=권문세족 억압책) - 정방 폐지(인사권 담당기구, 국왕의 인사권 회수=이부, 병부의 기능 회복)

                                                         - 교육·과거 제도 정비(성균관을 순수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 기술학부 분리, 전시 실시)

                                                         - 전민변정도감 설치: 신돈 등용 (개혁 승려)

                                                         - 내재추제 신설

        4. 결과 - 1) 개혁 실패: 원의 압력+신돈 제거+공민왕 시해+신진사대부의 역량 미비

                      2) 신진사대부의 성장: 개혁 실패 후 성장 세력

 

        ① 장례원: (조선 세조) 노비소송 담당 관청
        ③ 『동국병감』: (조선 문종, 김종서) 고조선~고려 말 전쟁사 정리

        ④ 과전법: 공양왕, 급전도감 설치-권문세족 소유의 경기 토지를 몰수→농민에게 분배(부분적 토지 개혁) ⇒ 역성혁명들에게 과전으로 지급

 

 


문 13. 다음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인구 변화 추세를 나타낸 <표>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 은 것은?


①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삼남지방의 개발과 인구 유입 때문이 었다.
②  명대 초기 1억 4천만 명 정도였던 중국의 인구는 청대 초기 3억 명을 돌파하였고, 19세기 중반에 4억 2천만 명에 이르렀다.
③  17세기~18세기 초반 조선을 비롯한 삼국은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농경지가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인구가 많이 증가하였다.
④  17세기 이후 일본의 인구는 정체현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정답: ③

 

해설: 조선 후기 인구 변화
        이앙법 보급, 외래작물이 도입되는 등의 농업기술 발달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문 14. 밑줄 친 ‘이 농서’가 처음 편찬된 시기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농상집요는 중국 화북 지방의 농사 경험을 정리한 것으로서 기후와 토질이 다른 조선에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각 도의 농민들에게 물어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이 농서가 편찬되었다.


①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표현한 「몽유도원도」가 그려졌다.
②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이 성립되었다.
③ 윤휴는 주자의 사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④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정답: ①


해설: 세종, 『농사직설』-우리나라 최초의 농서, 우리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 정리, 농민들이 실제 경험한 농법을 종합하여 간행

 

         ① 몽유도원도(안견): 15세기, 안평대군이 꿈꾼 내용을 그림, 현재 일본 덴리 대학 도서관에 소장
         ② 고려 지눌: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선⊃교 통합운동)⇒성공

                              조계종 창시, 돈오점수, 정혜쌍수
         ③ 경신환국(1680): 허적(남인)의 유악사건 + 허견(허적의 서자)의 역모 사건 ⇒ 남인의 정계 대축출

                                        = 경신대출척, 허적과 남인의 우두머리 윤휴 처형

         ④ 진경산수화: 18세기 전반,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중국화풍은 유지), 

 

 


문 15. 밑줄 친 ‘이번 문서’를 보낸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덕에 귀의하여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강화로 도읍을 옮긴 지 40년에 가깝지만, 오랑캐의 풍습을 미워하여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려첩장(高麗牒狀)』-


①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②  최충헌이 신변 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조직하였다.
③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④  쌍성총관부 탈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

 


정답: ①


해설: 삼별초 -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시작, 좌별초+우별초+신의군(몽골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풀려난 군인)
        
         ② 교정도감(정치적 기반): 반무신세력 감찰 기구, 중방+도병마사+식목도감, 최고 집정부 역할

             도방(군사적 기반): 군사력 강화
         ③ 광군: 정종 때 설치
         ④ 쌍성총관부 탈환은 삼별초 해산 이후, 공민왕의 무력 탈환 (유인우)

 

 

 

문 16. 다음 글을 남긴 국왕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보잘 것 없는 나, 소자가 어린 나이로 어렵고 큰 유업을 계승하여 지금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덕이 부족하여 위로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답하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근심하며 두렵게 여기면서 혹시라도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유업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가산(嘉山)의 토적(土賊)이 변란을 일으켜 청천강 이북의 수 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나의 죄이다.
-『비변사등록』-


①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②  공노비 6만 6천여 명을 양인으로 해방시켰다. 
③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격침되었다.
④  삼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정답: ②

 

해설: 순조(1800~1834) -19C 시작, 세도정치 시작

         -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11세)

         - 정순왕후의 수렴청정(노론 벽파의 권력 독점) → 신유박해(1801): 규장각 검서관 축출, 장용영 혁파, 5군영 부활, 정약용(강진)·정약전(흑산도) 유배 → 『자산어보』저술

         - 정순왕후 사후(1805) 벽파 쇠퇴 ⇒ 안동 김씨가 정권 장악: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 장악, 반남 박씨(박종경) 집안과 연합하여 정국 운영 ↔ 효명세자의 대리청정(1827~1830) ⇒ 실패

         - 공노비 66,000명 해방(순조 1년, 1801)

         - 홍경래의 난 발생(1811)

           1) 원인-평안도 서북민에 대한 차별 대우: 중앙 관직에 진출 불가, 상공업 활동 억압, 소외 지역(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라 농본주의 사회인 조선에서는 중요도가 떨어짐)

           2) 전개-홍경래(몰락한 양반) + 중소 상공인 + 광산 노동자 + 영세 농민 주도

                      -청천강 이북(가산, 박천)에서 봉기→정주성 점령 →관군에 진압

           3) 의미-순조 시기 세도 정치의 모순이 표출된 사건

 

         ① 최제우가 동학 창시 - 철종(1860)
         ③ 제너럴셔먼호 사건 - 고종 (1866) → 신미양요 (1871)
         ④ 임술농민봉기 - 철종(1860) → 삼정이정청 설치

 

 

 

문 17. 조선 후기 천주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기해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은 그 지역의 어류를 조사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② 안정복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천학문답』을 저술하였다.
③ 1791년 윤지충은 어머니 상(喪)에 유교 의식을 거부하여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 권상연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④ 신유사옥 때 황사영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달라는 서신을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정답: ①

 

해설: 천주교 박해

        - 전파: 17C 광해군 때 중국에 다녀온 우리나라 북인 사신들에 의해 학문(서학)으로 유입

                  이수광『지봉유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소개

       - 확산: 남인 계열 실학자(정약종, 이승훈(최초 세례자,1784))에 의해 신앙으로 수용(18C 후반)→백성들 사이에서 점차 확산

       - 탄압: 신해박해 전 을사추조 적발 사건(1785)-명례방(김범우의 집) 미사 사건(→현재 명동성당 터)

 

       [신해박해(1791, 정조)] - 진산 사건: 윤지충(유교식 제사를 거부하여 어머니의 신주를 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제사 진행), 권상연, 권일신(목사) ⇒ 윤지충, 권상연 처형, 권일신 유배

                                          - 척사학교 반포: 1795, 정조

       [신유박해(1801, 순조)] - 정조 사후 노론 벽파 집권 → 정조의 측근 세력인 남인, 시파 제거 시작

                                          - 중국인 신부 주문모 사형

                                          - 이가환, 권철신, 정약종, 이승훈 처형

                                          - 정약용(강진), 정약전(흑산도⇒『자산어보』저술) 형재 유배

                                          - 황사영 백서 사건

       [기해박해(1839, 헌종)] - 신자 색출을 위해 5가작통법 시행

                                          - 척사윤음 반포: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처벌

                                          -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천주교 지지 책『상재상서』)과 프랑스 선교사 처형

       [병오박해(1846, 헌종)] - 천주교 최초의 신부 김대건 처형 (당진 중심 포교) + 8인의 남녀 처형

       [병인박해(1866, 고종)] - 병인양요의 원인

                                          - 남종삼 등 천주교 신자 8천여 명 처형

                                          - 프랑스 선교사 9명 처형

 

 

 

문 18. 조선시대의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정도전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으며, 특히 『춘추』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② 이황은 16세기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③ 18세기에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과, 이를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④ 유형원과 이익의 사상을 계승한 김정희는 토지제도 개혁론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답: ③

 

해설: 호락논쟁 - 18C 전반 서인 노론 내부의 논쟁

         인물성'이'론: 호론(충청 노론: 권상하, 한원진, 윤봉구), '기'의 차별성 강조(주기론) ⇒ 위정척사 사상

         인물성'동'론: 낙론(경기·서울 노론: 이간, 이재, 김창협), '이'의 보편성 강조(주리론) ⇒ 중상학파 형성 ⇒ 개화사상

 

         ① 정도전: 급진 개혁파, 조선의 설계자,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여겼다.

         ② 이이: 16세기 통치체제 정비와 수취제도에 대한 개혁을 주장
         ④ 정약용: 여전론 주장

 

 

 

문 19. 다음은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건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①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② 독립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었다.
③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④ 파리강화회의에 신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널리 알렸다.

 

 

정답: ④

 

해설: 3·1 운동의 전개(1919)

         -배경 <국외>: 1917. 러시아 혁명→레닌의 약소민족 해방 운동 지원 선언

                               윌슨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 주창(1918)

                               신한청년단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독립 청원서 제출 (실패)

                               독립 선언 활발: 대동단결 선언문(1917, 하와이)- 신한혁명당

                                                       2·8 독립 선언(1919, 도쿄)-이광수 집필, 조선 청년 독립단 조직(일본 거주 한인 유학생들 중심), 선언서와 결의문 발표 ⇒ 3·1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

         -배경 <국내>: 고종의 서거 ⇒ 고종 독살설 유포 ⇒ 국민들의 분노 증대, 무단 통치에 대한 반발 증대

                               민족대표 33인 결성(종교 단체 대표:기독교(이승훈), 불교(한용운), 천도교(손병희) + 학생 단체 대표 ⇒ 3·1 운동 계획

         -전개: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최남선) + 공약 3장(한용운) ⇒ 전국 각지로 배부

                   고종의 인산일을 기점으로 3·1 운동 발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 ⇒ 만세 부르고 자진 체포

                   학생·시민들,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

                   [1단계] 민족 대표자·학생 중심의 비폭력 만세 시위

                   [2단계] 학생 중심, 지방 도시로 확산 (노동자들의 호응)

                   [3단계] 농민 참여, 농촌 각지로 확산, 폭력 투쟁으로 변모(토지 조사 사업의 영향) + 국외로 확산 → 해외 한인 자유대회 in 필라델피아

                   [일제의 탄압]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유관순 열사 순국 ⇒ 일본에 대한 세계 여론 악화

         -결과: 일제 통치 방식의 변화 (무단통치 ⇒ 문화통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계기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 1919. 9.)

                   만주 무장 투쟁 활성화 ⇒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 전환 - 실력 양성 운동, 학생 운동 증가

                   반제국주의 운동의 신호탄 -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문 20. 4․19 혁명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② 농지개혁이 실시되어 농민들은 자작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③ 혁명 이후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④ 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되었다.

 

 

정답: ④

 

해설: 4·19 혁명 (1960)

        (3.15.) 제 4대 대선에서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마산 시위 → 김주열(학생) 행방불명

        (4.11.)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눈에 최루탄이 박힘) → 마산 2차 시위 (이승만 정부 "시위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다")

        (4.18.)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전개, 귀교 도중 폭력배들의 습격

        (4.19.) 4·19혁명 발생, 학생+시민들이 중앙청(대통령 집무실)까지 진입 →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 비상계엄령 선포(군사권 발동)

        (4.25.) 서울 시내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 발표: 이승만 퇴진 요구

        (4.26.) 이승만 하야 → 허정(외무장관) 과도 정부 수립

                   ⇒ 제 3차 개헌 - 내각 책임제(의원 내각제), 양원제 국회: 민의원, 참의원으로 구성, 대통령 간선제

                   ⇒ 제 5대 총선 - 민주당 압승

                   ⇒ 제 4대 대선(간접 선거, 8월) -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실권 장악) ⇒ 장면 내각(민주당) 출범

 

 

         ① 5.10총선거(1948) -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198명의 국회의원 선출, 제헌 국회(1대 국회) 구성
         ② 농지개혁법(1949년에 법 제정, 1950년에 실시) - 유상 매입, 유상 분배 ⇒ 경자유전의 원칙 실현(지주제 혁파, 소작농↓, 자영농↑)
         ③ 장면 내각 - 평화 통일론 주장, but 남북 대화에 소극적,

                             - 진보 진영+학생들: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 제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