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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努力];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씀.
2014 국회직 9급-한국사 (가)책형 기출 문제 및 정답 본문
1. 다음 중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②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③ 남한산성은 축성기술의 발달 단계를 보여준다.
④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⑤ 해인사 장경판전은 고려인의 호국염원이 담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정답: ④
해설: ① 석굴암-(751년~77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② 창덕궁-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③ 남한산성-201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⑤ 팔만대장경이 몽골 침입 시기에 호국을 기리는 염원에서 조판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2. 다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밑줄 친 ‘이 시기’의 생활상으로 옳은 것 은?
이 시기에는 뼈바늘을 비롯하여 실을 뽑는 도구인 가락바퀴도 발견되어, 옷을 만들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
① 긁개와 밀개 등을 이용하여 동물을 사냥하였다.
② 거대한 무덤인 고인돌을 조성하였다.
③ 동굴이나 막집 등에서 생활하였다.
④ 농경을 시작하고 생산된 식량을 저장하기도 하였다.
⑤ 계급이 등장하여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형성되었다.
정답: ④
해설: 뼈바늘, 가락바퀴 - 신석기
①, ③ 구석기
②, ⑤ 청동기
3. 다음 중 위만조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위만은 왕이 된 후 고조선의 준왕을 한왕(韓王)으로 책봉하였다.
② 위만은 고조선에 망명해 올 때 상투를 틀고 왔다.
③ 위만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④ 위만은 동방의 예, 남방의 진이 한(漢)과 교역할 때 중계무역을 펼쳤다.
⑤ 위만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정답: ①
해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고,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4.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부여의 옛땅을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②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③ 북으로는 돌궐, 남으로는 일본과 통교하였다.
④ 초기에는 당과 대립하였으나 문왕(文王)대에 이르러 국교를 수립하였다.
⑤ 10세기 초반 여진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정답: ⑤
해설: 10세기 초(926)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
5.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투쟁을 옳게 설명한 것은?
① 양만춘은 수나라의 별동대를 안시성에서 격퇴하였다.
② 수 양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③ 고구려가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해 수나라를 견제하였다.
④ 연개소문은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⑤ 을지문덕은 당 태종에 의한 2차 침입 때 살수대첩으로 막아냈다.
정답: ③
해설: 여수전쟁 - 598년, 고구려 영양왕이 수나라를 선제 공격
- 6C 말,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고구려의 격퇴
- 7C 초, 수 양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 살수대첩(612, 을지문덕)
-이후 두 차례 더 공격→격퇴→수나라 멸망(618)
천리장성 축조(631~647) - 연개소문(요역 징발 → 군사력 강화) →쿠데타 성공(영류왕 폐위→보장왕 옹립): 연개소문의 정권 장악 →대당 대립 관계 형성
여당전쟁 -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 → 안시성 전투(645, 양만춘)
- 이후 공격 → 모두 격퇴
⇒ 나당연합(648)
① 양만춘은 당의 군대를 안시성에서 격퇴하였다.
② 고구려는 7세기 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④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펼쳤다.
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은 수와의 전쟁이다.
6. 고려시대 토지제도인 전시과에 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시정전시과는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한 것이 아니고, 소유권을 지급한 것이다.
② 목종대에는 인품을 반영하여 18과로 세분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
③ 무신정변 이후 전시과 체제의 문란이 심화되었다.
④ 문종대에는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여 현직 관료에게 경기 지역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⑤ 왕실에는 공해전,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는 내장전을 지급하여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
정답: ③
해설: 전시과는 토지 독점과 세습 경향으로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했고 조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가 점차 감소하였으며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폐단은 심화되었다.
① 시정전시과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전시과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을 지급
② 경종 때 제정된 시정전시과에서는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이 반영되었다. 목종 때 개정된 전시과에서는 관직만을 고려하여 지급되었다.
④ 토지 부족으로 문종 때 경정전시과에서는 현직 관료에게만 지급하였다. 경정전시과에서 시지의 경우 경기 지역에 한해 지급하였지만 전시과는 전반적으로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지급하였으며, 경기 지역에 한해 지급한 것은 조선 시대 과전법이다.
⑤ 내장전은 왕실 경비를 위해, 공해전은 중앙과 지방의 관청 경비를 위해 지급하였다.
7. 다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불교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은?
○ 아미타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데 앞장 섰다. ○ 불교 경전을 폭넓게 이해하여 『대승기신론소』와 『금강 삼매경론』을 저술하였다. |
① 의상-화엄 사상
② 원효-정토 사상
③ 원측-유식 사상
④ 혜초-왕오천축국전
⑤ 진표-법상종 사상
정답: ②
해설: 원효 - 6두품 출신, 당 유학 경험 X (일체유심조)
- 법상종 개창 (경주 분황사)
- 불교 이해 기준 확립(한국 불교를 탄생): 『대승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저술
- 일심(一心)사상을 바탕으로 한 종파 간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함→『십문화쟁론』저술 (화쟁사상)
- 아미타 신앙: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 극락 정토에 갈 수 있다 (정토종) → 불교의 대중화
- 화엄학 연구:『화엄경소』저술
의상 - 진골 출신, 당 유학 (지엄의 문하생),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종 개창(제자 양성, 낙산사)
- 화엄 사상 정립: 『화엄일승법계도』저술 - "하나가 우주 만물을 아우른다." (부처=왕, 왕즉불)
- 화엄의 원융 사상: 일즉다 다즉일→삼라만상이 하나로 돌아감→전제 왕권 강화
- 아미타 신앙+관음 신앙(현세구복)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원측 - 진골 출신, 당 유학(현장의 문하생→신유식)
- 유식학의 대가 (경전 해석의 대가)
- 서명학파 형성: 티벳 불교에 영향을 줌
- 저서:『해심밀경소』,『인왕경소』 저술
혜초 - 인도 기행:『왕오천축국전』저술 (중국 둔황 석굴에서 발견,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보관)
8. <보기>는 한국 근대 독립운동가의 저술에서 인용한 글이다. 이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보기>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나니... |
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언론활동을 하였다.
② 양기탁·이동녕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③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④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일제의 침략 을 비판하고 민족정신을 고양하였다.
⑤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의열단의 선언인 조선혁명선언 을 작성하였다.
정답: ④
해설: 신채호 - 낭가 사상(단군신화에 초점을 둔 우리 고유 사상) 강조, 고대사 연구에 치중
- 「독사신론」(1908):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방향 제시, <대한매일신보>에 연재
- 『조선사연구초』(1924):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1천 년래 제1대 사건'으로 평가
- 『조선상고사』(1931): 역사는 '我(아)와 '非我)'의 투쟁 (일제시대의 투쟁을 두려워말라, 투쟁을 통해 발전)
- 『조선혁명선언』(1923): 의열단 강령, 민중 직접 혁명의 중요성 강조
④ 박은식 - 민족정신: '혼' 강조 (혼백 사상, 혼(역사)이 있어야 백(기술·산업)이 발전한다)
- 『한국통사』(1915): 현재사 중심의 연구, '나라는 형이요, 역사는 신이다'→역사를 지키면 나라를 잃어도 다시 만들 수 있다.
-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 국혼 강조, 3·1운동의 과정 서술
9.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 변화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향·소·부곡의 소멸
② 농민층의 분화
③ 관노비의 해방
④ 중인 세력의 성장
⑤ 양반 호구의 증가
정답: ①
해설: 향·소·부곡은 조선 초에 소멸
10. <보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 장편 서사시에 대하여 올바르게 설명한 것은?
<보기> 동명왕의 본기를 보니 그 신비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보다 더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신이나 환상 이야기로 여겼는데, 반복하여 읽어서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상과 귀신이 아니고 신성한 것이었다. …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앞으로 무엇을 보고 알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 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려고 한다. |
① 조선 후기에 실학자가 민족적 자각의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② 고구려의 발전 과정에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충성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썼다.
③ 대몽항전기에 역사 전통을 내세워 항전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썼다.
④ 조선 초기에 새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힐 목적으로 썼다.
⑤ 무신집권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고려의 역사 전통을 고취할 목적으로 썼다.
정답: ⑤
해설: 이규보, 『동명왕편』(1193)
⑤ 이규보는 무신집권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강조하여 역사 전통을 고취하고자 하는 뜻에서「동명왕편」을 저술하였다.
② 삼국 시대에는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④『용비어천가』등
11. 밑줄 친 ‘내’가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상왕이 나이가 어려 무릇 조치하는 바를 모두 의정부 대신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지금 내가 왕통을 계승하여 국가의 모든 일을 처리하며 우리나라의 옛 제도를 복구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6조가 각각 그 직무를 담당하여 직계한다. |
① 영정법을 시행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호구 파악에 힘썼다.
② 4군 6진을 개척하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③ 홍문관을 설치하고 『경국대전』을 반포하였다.
④ 경연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⑤ 역법서인 『칠정산』을 간행하고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정답: ④
해설: 세조, 6조 직계제 부활
세조(1455~1468) ⇒ 왕권 강화 - 6조 직계제 부활, 집현전 폐지→경연, 사가독서제 폐지
- 종친 등용→ 왕실의 힘 강화
- 「경국대전」편찬 시작
- 군사 제도 정비: 보법, 진관체제, 5위, 영진군, 둔전
- 계유정난 ⇔ 이징옥의 난(1453)
- 중앙집권 강화 ⇔ 이시애의 난(1467)+(함흥부) 유향소의 지지 ⇒ 유향소 폐지
- 토지 측량 기구 인지의, 규형 발명 / 동국지도 제작(by 양성지): 실측 지도
- 직전법 실시(1466): 현직 관려에게만 수조권 지급, 수신전·휼양전 폐지 (세습 토지)
- 불교 진흥: 간경도감 설치(불경 「월인석보」간행·번역, 원각사·원각사지 10층 석탑 건립
① 인조
②, ⑤ 세종
③ 성종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에 착수하여 성종 때 완성)
12. 묘청의 난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귀족사회 내부의 족벌과 지역세력 간의 대립 양상이었다.
② 풍수사상 등 전통사상과 유학사상의 대립적 성격을 띠었다.
③ 묘청은 거란의 압력에 대항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하였다.
④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묘청 세력의 자주적 성격을 높이 평가하였다.
⑤ 난의 결과 서경파(西京派)가 몰락하고 서경의 분사(分司)제도가 폐지되었다.
정답: ③
해설: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과 분열 (문종~인종)
묘청의 난(1135) - 1. 원인: 이자겸의 난(1126) 이후 서경천도설 대두→서경파VS개경파
2. 전개: 서경 천도 운동: 서경에 대화궁 건립(1128)→개경파의 반대로 실패
묘청의 봉기: 국호-대위국, 연호-천개, 군대-천견충의군→김부식의 관군에 의해 1년 만에 진압
3. 결과: 서경 약화(분사 제도 폐지), 숭문천무 풍조
*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묘청의 난을 긍정적으로 평가, '조선 역사 1천년래 '제1대 사건'
13. 고려 광종의 정책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① 노비안검법 실시
② 과거제 실시
③ 황제로 자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
④ 법안종(法眼宗) 중심으로 교단 통합 시도
⑤ 호족과 결탁하여 문신귀족 탄압
정답: ⑤
해설: 광종(949~975)
[왕권 강화책] 1. 주현공부법: 지역별로 세금을 놓은 법, 국가재정확보
2. 노비안검법: 호족 ↓, 국가 재정 ↑
3. 과거 제도: 쌍기의 건의
4. 공복 제정: 자색·단색·비색·녹색 (4색 공복)
⇒ 국왕 중심의 통치 질서 확립
[대외정책] 1. 내제외왕: 독자적 연호- 광덕, 준풍
2. 개경: 황도, 서경: 서도
3. 송과 통교(962)
[기타] 1. 제위보 설치(963)
2. 불교 정비
3. 승과 실시
4. 국사·왕사 제도 시행
5. 사찰 건립: 귀법사, 홍화사 건립
14. 다음 지문과 관련된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운동상 실천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으니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체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분투하려면 우선 조선 자매 전체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
① 여성의 지위 향상과 생활 개선 등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② 평양에서 자기회사, 대구에서 태극서관을 운영하였다.
③ 청년학생들이 농민을 대상으로 사회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④ 백정들이 신분차별 타파를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⑤ 일제와 타협하여 자치권과 참정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정답: ①
해설: 근우회의 창립취지문
일제강점기 사회·경제적 민족 독립 운동
- 여성운동: 특징-1920년대 초반 계몽적 성격의 운동→1920년대 후반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
- 근우회(1927,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 - 결성: 신간회의 자매단체, 김활란 중심
- 활동: 기관지인 『근우』발행, 강연회·토론회 개최, 여성 의식 계몽 운동 전개
- 해체: 신간회 해소와 함께 해체됨
② 신민회
③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운동과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과 관련된 내용이다.
④ 조선 형평사(1923)
⑤ 타협적 민족주의, 이광수의 '자치론' -「민족적 경륜」(1924, 동아일보):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 운동을 하자"→민주주의, 자본주의 성숙 후에 독립
-「민족개조론」: 자치권 획득 주장, "기둥에 문제가 있어 대한제국이 무너졌는데 다시 세워봤자 또 무너진다."
15. 대동법에 대하여 올바르게 설명한 것은?
① 광해군대에 이원익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②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물 대신 쌀로 납입하게 하였다.
③ 군역의 폐단을 막기 위해 군포를 1필로 경감하였다.
④ 대동법으로 인해 농민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⑤ 균역청에서 관장하다가 호조로 이관되었다.
정답: ②
해설: 공납(15C) → 대납 → 방납(16C), 방납의 폐단 → (대공)수미법, 실패 → 대동법(광해군, 17~18C)
대동법 - 토지 결수에 따라 쌀·삼베·동전 등으로 납부
- 토지 1결당 12두 납부: 지주 반발, 전호 선호
- 점진적 시행: 경기도(광해군, 1608)→강원도(인조)→충청도·전라도(효종)→전국 시행(숙종, 1708)
⇒ 공납의 전세화
대동법 시행의 결과 - 부과 기준: 가호→토지 ⇒ 공납의 전세화
- 경제 구조의 변동: 자유 수공업 발달 ⇒ 자유 상공업 발달
상품 화폐 경제 발달 + 화폐 유통(3차 상평통보) + 조세의 금납화 ⇒ 화폐 유통 활성화
대동법의 한계 - 상공에만 적용, 별공과 진상은 존속
- 지방 재정 악화: 상납미 ↑, 유치미 ↓ ⇒ 수령의 농민 수탈 심화
-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동세를 소작농에게 전가 ⇒ 소작료 인상 등 농민 부담 다시 가중
③ 영조, 균역법
④ 대동법의 실시로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의 공물 부담은 없어지거나 줄어들었으나 대동법 시행의 결과로는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⑤ 대동법은 선혜청에서 관장
영조 때 균역법을 담당하기 위한 균역청이 설치되었고 이후 균역청이 선혜청에 소속되었다.
16. 고려의 대외 관계 가운데 거란(요)과 관련된 것은?
(가) 서희의 강동6주 획득 (나) 강감찬의 귀주대첩 (다) 윤관의 별무반 설치 (라) 천리장성 축조 (마) 동북 9성 축조 (바) 김윤후의 처인성 전투 |
① (가)-(나)-(다)
② (가)-(나)-(라)
③ (나)-(다)-(라)
④ (나)-(다)-(마)
⑤ (다)-(마)-(바)
정답: ②
해설: [거란의 침입과 격퇴]
- 배경: 고려의 북진정챙 + 친송정책
- 1차 침입(993, 성종 12): 소손녕의 침입(+80만 대군) → 서희의 외교 담판 → 강동 6주 획득(국경선 확장) → 송과 단교, 거란과의 수교(조공) 약속
- 2차 침입(1010, 현종 원년): 원인- 친송정책 유지 + 거란과의 교류 회피 + 강조의 정변(1009, 목종 폐위, 현종 옹립)
거란의 성종 침입(+40만 대군, 강동 6주 반환 요구) → 개경 함락 (but 양규의 활약: 흥화진(의주) 전투) → 거란은 퇴로 차단의 두려움으로 강화 체결(현종의 입조 약속)
- 3차 침입(1018, 현종 9): 원인- 현종의 입조 약속 불이행 + 강동 6주 반환 거부
거란의 소배압 침입(+10만 대군) →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 고려의 강화 제의 → 강화 체결(송과의 국교 단절 약속)
- 영향: 1) 동북아시아 세력 균형 상태: 송-요-고려
2) 국방력 강화: -나성 축조(1009~1029): 개경의 외성(왕가도)
-천리장성 축조(1033~1044): 북방 민족(거란, 여진)의 침입에 대비, 압록강~도련포
3)「초조대장경」조판 + 「7대실록」편찬
4) 보수 세력의 성장 (→문벌 귀족의 등장)
[여진 정벌과 동북9성 축조]
- 여진: 고려 초기 친선 관계
- 11C 말: 완옌부 추장 영가가 여진족 통합 후 고려와 잦은 충돌→별무반 편성(1104, 숙종, 윤관의 건의) → 별무반의 여진 정벌 추진(1107, 윤관과 오연총의 17만 별무반, 예종) → 동북 9성 축조(1107) →동북 9성의 유지 어려움(서북쪽 거란과의 대치 상황에서 동북쪽 여진 방어에 과도한 군사비 지출) → 동북 9성 반환(1109)
- 금 건국(1115, 아구타) → 1125, 요를 멸망
→ 1125, 고려에 군신관계 요구(이자겸의 수용 → 이자겸의 난, 1126)
→ 1127, 금의 송 공격 (송→남송)
⇒ 금의 사대 요구 수용 = 북진 정책 좌절
[몽골과의 전쟁]
- 몽골 통일: 몽골 제국 건설(칭기스 칸) → 금의 세력 약화
거란이 대요수국 건국, 금의 후예들이 동진국 건국(두만강 유역)
- 강동성 전투(1218~1219): 고려+몽골+동진국 연합군 결성 ⇒ 거란군 (대요수국) 격퇴
- 발단: 강동성 전투 이후 몽골의 조공 요구(사신 저고여 파견) → 저고여 압록강에서 피살(1225) → 몽골의 침입(1231)
- 경과: 1차 침입(1231)- 몽골 장수 살리타 의주 침입 → 박서의 저항(귀주성) → 개경 포위 ⇒ 몽골의 조공 요구 수용
2차 침입(1232)-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
-강화 천도(최우) →몽골 재침입 → 용인 처인성 전투(김윤후): 몽골 장수 살리타 사살
3차 침입(1235)- 문화재 소실: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cf. 2차 침입 때 「초조대장경」소실), 「재조대장경」조판(팔만대장경, 1236~1251)
5차 침입(1252)- 김윤후의 충주 전투(충주성 방호 별감)
6차 침입(1254)- 충주 다인철소 항쟁 (→익안폐현 으로 승격)
⇒ 대몽항쟁- 민중항쟁 → 산성·해도(섬) 입보 정책
- 개경 환도(1270): 몽골에 항복
[삼별초의 항쟁(1270~1273)]
- 배경: 몽골과의 강화 반대(개경 환도 반대)
- 경과: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고려 왕자)을 왕으로 추대 (by 배중손) → 진도로 이동(용장성 중심으로 항쟁, 일본에 국서를 보내 대몽 연합을 제의) → 경상·전라 일부 지역으로 진출, 배중손 사망 → 제주도로 이동(김통정) → 여·몽 연합군에게 평정(김방경)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 설치(1273), 목마장 운영
17. 다음의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올바르게 배열된 것을 고르시오.
가. 봉오동 전투 나. 자유시 참변 다. 정의부 조직 라. 통의부 조직 |
① 가–나–다-라
② 가–나–라-다
③ 가–라–나-다
④ 나–다–라-가
⑤ 나–라–다-가
정답: ②
해설: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투쟁
[1920 무장 투쟁의 승리]
◎ 봉오동 전투: 최고 일본 정규군 VS 독립군-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축(+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연합)→일본군을 기습하여 독립군의 승리
⇒ 훈춘 사건(만주 지역의 독립군 소탕을 위해 일본이 조작): 일본이 만주 마적떼를 매수해 일본 관공서 습격 요청 → 관공서 습격 → 독립군 소행으로 조작 →일본이 만주로 출병
◎ 청산리 전투(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완루구, 고동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VS 출병 일본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긴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군민회군, 천주교 대한 의민단) ⇒ 독립군의 대승
◎ 간도 참변(경신 참변): 일본의 보복(독립군 소탕 목적), 북간도 한민 촌락 습격, 방화, 강간, 학살 ⇒ 한인 부락이 많이 사라짐
◎ 독립군 이동: 북만주 밀산부(한흥동)로 이동
◎ 통합 부대 결성: 밀산부에서 대한 독립 군단 결성 (총재: 서일)
[1921 독립군의 시련]
-일본군의 추격 → 소련 자유시로 이동 (소련 내전 중 적색군 VS 백색군)
-적색군의 용병화 ⇒ 독립군 냅의 지휘권 다툼 (상하이파, 공산당, 박일리야 VS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오하묵)
상하이파가 초기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적색군이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며 독립군의 무장 해제 요구 → 독립군(상하이파 공산당)의 거부 ⇒ 자유시 참변(1921.6.) ⇒ 독립군 세력 와해
[1922 독립군의 재정비]
-대한 독립 군단 재결성 ⇒ 대한 통군부 조직 (=대한통의부)
-3부 결성(1923~1925): 참의부(1923, 압록강 유역) ⇒ 육군 주만 참의부(임시정부 직할 부대)
정의부(1924, 남만주 유역)
신민부(1925, 북만주 유역)
-단듕 광복군 사령부(1919) ⇒ 광복군 총영(1920) ⇒ 육군 주만 참의부에 흡수
18. 조선 후기 농촌사회의 양상과 관계 없는 것은?
① 상업적 농업의 보급
② 수리시설의 발달
③ 직파법(直播法)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변화
④ 도조제(賭租制)에서 타조제(打租制)로 변화
⑤ 광작(廣作)의 성행
정답: ④
해설: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확산 - 이모작 가능 (벼+보리)
- 1열로 모내기 ⇒ 노동력 절감(1/5정도 감소), 벼 생산량 증대(2배)
- 단점: 옮겨심어 뿌리가 약해 가뭄에 취약함 →정부가 금지했으나 농민의 저항 ⇒저수지, 보 축조
- 소작농 중 소수가 광작: 소작지를 상실한 대다수의 소작농들은 토지 결박 상태에서 풀려나 임노동자, 화전민, 수공업자 등으로 변화하였고, 광작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소작농들은 쌀을 상품화, 상업적 농업을 시작 (+상품 작물 재배, 농기구 개량)
④ 조선 전기 타조법 - 정해진 비율에 따라 정율지대 → 병작반수제(½)
- 지주의 영농 간섭 ↑ = 신분 예속 관계
생산력 증대(이앙법) ⇒ 전호권의 성장 (소작농의 권위↑) ⇒ 농민들의 저항 "항조 운동", 부재 지주의 증가(생산량을 알 수 없음, 타조법은 생산략을 속이기 쉬움)
조선 후기 도조법 - (일부 지역) 정액 지대(약⅓, 액수를 정함)
- 지주의 영농 간섭 X (자유 영농) ⇒ 근로 의욕 고취
19. 다음의 사건을 시대순으로 올바르게 배열한 것은?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 자유당의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 남과 북은 7․4남북공동성명서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원칙에 합의하였다. ㉤ 10월유신을 단행하여 대통령에게 강력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
① ㉠-㉡-㉥-㉢-㉣-㉤
② ㉠-㉡-㉢-㉥-㉤-㉣
③ ㉠-㉡-㉢-㉥-㉣-㉤
④ ㉡-㉠-㉢-㉤-㉥-㉣
⑤ ㉡-㉠-㉢-㉥-㉤-㉣
정답: ③
해설: ㉠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8. 15.)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구성(1948. 10.)
㉢ 4·19 혁명(1960)
㉥ 베트남 파병(1965)
㉣ 7·4 남북공동성명(1972. 7.)
㉤ 10월 유신(1972. 10.)
20. 독도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일제는 청일전쟁 중 독도를 시네마현에 편입시켜 일본의 영토로 만들었다.
②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하였다.
③ 대한제국기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관할구역으로 석도(독도)를 규정하였다.
④ 조선 숙종대 안용복은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⑤ 『고려사』에는 우산국에서 고려 정부에 토산물을 바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정답: ①
해설: 울릉도·독도
- 숙종(1696) 때 안용복 → 일본에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 (but 어민의 침범 계속됨 ⇒ 이주 장려, 군 설치, 관리 파견)
- 대한제국 칙령 41호(1900):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 울릉군으로 승격(지방 행정구역), 독도는 울릉도 관할
but, 러·일 전쟁 이후에 일본이 멋대로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마네 현 고시 40호> (1905)
↔ <태정관 지령문>: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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